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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 권고

§3

허용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혼인의 상대적 선

허용되는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순수한 뜻은 아님을 논하고, "혼인하는 것이 불타는 것보다 낫다"라는 바오로의 말을 검토하여 혼인이 절대적인 선이 아니라 더 큰 악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 선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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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Quae enim in manifesto, scimus omnes, eaque ipsa qualiter in manifesto sint perspiciendum est. Nam etsi quaedam videntur voluntatem dei sapere, dum ab eo remittuntur, non statim omne quod permittitur ex mera et tota voluntate procedit eius qui permittit.1 Ex indulgentia est quodcumque permittitur. Quae etsi sine voluntate non est, quia tamen aliquam habet causam in illo cui indulgetur, quasi de invita venit voluntate, passa causam sui quae cogit voluntatem. Vide, qualis sit voluntas cuius alter est causa. Secunda item species consideranda est purae voluntatis. Vult nos deus agere quaedam placita sibi, in quibus non indulgentia patrocinatur, sed disciplina dominatur. Si tamen alia istis praeposuit, utique quae magis vult, dubiumne est ea nobis sectanda esse quae mavult, cum quae minus vult, quia alia magis vult, perinde habenda sunt atque si nolit? Nam ostendens quid magis velit, minorem voluntatem maiore delevit. Quantoque notitiae tuae utramque proposuit, tanto definiit id te sectari debere quod declaravit se magis velle. Ergo si ideo declaravit, ut id secteris quod magis vult, sine dubio, nisi ita facis, contra voluntatem eius sapis, sapiendo contra potiorem eius voluntatem, magisque offendis quam promereris, quod vult quidem faciendo et quod mavult respuendo. Ex parte delinquis; ex parte, si non delinquis, non tamen promereris. Non porro et promereri nolle delinquere est? Secundum igitur matrimonium, si est ex illa dei voluntate quae indulgentia vocatur, negabimus meram voluntatem cui indulgentia est causa, si ex ea cui potior alia praeponitur continentiae magis appetendae didicerimus non potiorem a potiore rescindi.2 Haec praestrinxerim, ut iam apostoli voces decurram. Inprimis autem non videbor inreligiosus, si quod ipse profitetur animadvertam, omnem illum indulgentiam nuptiarum de suo, id est de humano sensu, non de divino praescripto induxisse. Nam et cum de viduis et innuptis definiit, uti nubant, si continere non possunt, quia melius sit nubere quam uri, conversus ad alteram speciem, Nuptis autem denuntio, inquit, non quidem ego, sed dominus. Ita ostendit ex translatione personae suae in dominum id quod supra dixerat non ex domini persona, sed ex sua pronuntiasse, Melius est nubere quam uri.3 Quae vox licet ad eos pertineat qui inupti vel vidui a fide deprehenduntur, quia tamen omnes eam ad nubendi licentiam amplectuntur, velim pertractare quale bonum ostendat quod melius est poena, quod non potest videri bonum nisi pessimo comparatum, ut ideo bonum sit nubere, quia deterius sit ardere. Bonum ita est, si perseveret nomen obtinens sine comparatione, non dico mali, sed etiam boni alterius, ut, etsi bono alii comparatur et alio adumbratur, nihilominus remaneat in boni nomine. Ceterum si per mali condicionem cogitur bonum dici, non tam bonum est quam genus mali inferioris, quod a superiore malo obscuratum ad nomen boni impellitur. Aufer denique condicionem comparationis, ut non dicas, Melius est nubere quam uri, et quaero an dicere audeas, Melius est nubere, non adiciens quid sit id quod melius est. Ergo quod non melius, utique nec bonum, quia abstulisti et removisti condicionem comparationis, quae dum melius illud facit, ita bonum haberi cogit. Melius est nubere quam uri sic accipiendum est, quomodo melius est uno oculo quam duobus carere: si tamen a comparatione discedas, non erit melius unum oculum habere, quia nec bonum. Nemo igitur captet ex hoc capitulo defensionem, quod proprie ad innuptos et viduos spectat, quibus nulla adhuc coniunctio numeratur. Quamquam ostenderim etiam illis intellegendam esse permissi condicionem.

과연 명백하게 밝혀진 일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며, 그것들이 자체로 어떻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지를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 허용되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허용되는 모든 일이 허용하는 분의 순수하고 완전한 뜻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용되는 것은 무엇이든 관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의지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관용을 받는 자 안에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꺼리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의지를 강제하는 자의 원인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타자가 원인이 되는 의지가 어떠한 의지인지 보십시오. 마찬가지로 순수한 의지의 두 번째 종류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특정한 일들을 행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들 안에서는 관용이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규율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이것들보다 다른 것을 위에 두셨다면(그것은 확실히 더 원하시는 것인데), 더 덜 원하시는 일들은(다른 것을 더 원하시기 때문에) 마치 원치 않으시는 것처럼 여겨져야 할 때, 그분이 더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점에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분은 더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심으로써 더 작은 의지를 더 큰 의지로 지워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지식에 그 두 가지를 제시하신 것이 크면 클수록, 그분이 더 원한다고 밝히신 것을 당신이 따라야 한다고 그만큼 더 명확히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분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이 더 원하시는 것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밝히신 것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당신은 그분의 뜻에 반하여 생각하는 것이며, 그분의 더 강력한 뜻에 어긋나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면서도 더 원하시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신덕을 쌓기보다 오히려 그분을 불쾌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당신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비록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해도 신덕을 쌓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신덕을 쌓기를 원치 않는 것 자체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두 번째 혼인이 관용이라 불리는 저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관용이 원인이 되는 순수한 의지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더 원해야 마땅할 절제가 위에 놓여 있는 저 의지로부터, 더 원하지 않는 것이 더 원하는 것에 의해 취소된다는 것을 우리가 배운다면 말입니다. 나는 이제 사도의 말로 넘어가기 위해 이 일들을 대략 언급해 둡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스스로가 공언하는 바를 내가 주목한다면, 나는 불경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즉 그가 혼인에 대한 저 모든 관용을 자신의 생각, 곧 인간적인 분별력에서 도입한 것이지 신성한 규정에서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과부들과 미혼자들에 대하여, 만일 절제할 수 없다면 혼인하라고 규정했을 때(왜냐하면 혼인하는 것이 불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류로 고개를 돌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사실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인격을 주님께로 전이시킴으로써, 위에서 그가 말했던 것, 즉 "혼인하는 것이 불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주님의 인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서 선언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말은 비록 신앙 안에서 미혼이나 과부로 발견된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일지라도, 모든 이들이 그것을 혼인의 허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형벌보다 "더 나은" 것이 도대체 어떤 선을 보여주는 것인지 밝혀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가장 나쁜 것과 비교되지 않으면 선으로 보일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혼인하는 것이 선인 이유는 불타는 것이 더 나쁘기 때문일 뿐입니다. 선은 이와 같이, 악과의 비교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선과의 비교도 없이 그 이름 자체를 유지할 때 비로소 그러합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선과 비교되고 다른 선에 의해 가려진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이라는 이름 안에 머물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악의 조건 때문에 억지로 선이라 불리게 된다면, 그것은 선이라기보다는 더 낮은 단계의 악의 일종이며, 더 높은 악에 가려져 선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비교의 조건을 치워버려, 당신이 "혼인하는 것이 불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게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이 무엇이 더 나은지 덧붙이지 않고서 그냥 "혼인하는 것이 더 낫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따라서 더 낫지 않은 것은 당연히 선도 아닙니다. 당신이 그것을 "더 낫게" 만드는 비교의 조건을 제거하고 치워버렸기 때문이며, 그 조건이 그것을 그처럼 선으로 여겨지도록 강제하기 때문입니다. "혼인하는 것이 불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은 양쪽 눈을 잃는 것보다 한쪽 눈을 잃는 것이 낫다는 것과 같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비교에서 벗어난다면 한쪽 눈을 가진 것은 더 나은 것이 아닐 것이며, 선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 구절에서 변명을 취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 구절은 본래 아직 아무런 결합도 계산되지 않은 미혼자들과 과부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그들에게도 허용된 일의 조건을 이해해야 함을 이미 보여주었을지라도 말입니다.

구문 주해3건
  1. 3non statim omne quod permittitur ex mera et tota voluntate procedit eius qui permittit

    하나님의 '허용(permissio)'이 반드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무조건적인 '의지(voluntas)'의 직접적 표출은 아니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적 구분을 나타낸다. 관용에 의한 허용은 인간의 불완전함이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 '꺼리며 강제된' 의지에 가깝다고 규정된다.

  2. 3didcerimus non potiorem a potiore rescindi

    대격과 부정사 구조에서 non potiorem(더 원하지 않는 것, 즉 재혼)이 의미상 주어이며, a potiore(더 원하는 것, 즉 절제)에 의해 rescindi(취소되다, 무효화되다)된다는 관계를 나타낸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는 위계가 있어, 고차원의 선이 제시될 때는 저차원의 허용이 사실상 무효화된다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3. 3Melius est nubere quam uri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7장 9절의 인용구. 테르툴리아누스는 비교급 melius(더 낫다)가 사용된 점에 주목하여, 이것이 자립적인 '선(bonum)'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불타는 것(uri)'이라는 최악의 '형벌(poena)'이나 '악(malum)'과 비교될 때만 성립하는 상대적인 선택(더 가벼운 악)에 불과하다는 대비 구조적 해석을 제시한다.

번역: Gemini 3.5 Flash (2026-05-22 공개) · 수정 이력 (2건, 최근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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